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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은 쉬울까?

 

돈을 받는 일 치고 힘들지 않은 일은 없다. 쉬운 일이라면 돈을 쥐어주면서까지 시킬 리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비행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다. 가끔 주변 사람들이 비행이 뭐 때문에 힘드냐고 묻는데 이때 딱 하나를 꼬집어서 말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유는 힘들게 하는 원인이 매번 바뀌기 때문이다. 

 

어떤 비행은 시차 때문에 힘들고, 어떤 비행은 같이 일하는 동료 때문에 힘들고, 어떤 비행은 내 몸 컨디션이 좋지 못해서 힘들고, 어떤 비행은 식사 선호도가 맞지 않아 힘들고...

 

100개의 비행이 있다면 힘든 이유도 100개다. 늘 다이나믹한 직업이기에 재미있기도 하지만 일을 어렵게 하는 원인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사전에 대비하기도 어렵고 원인을 제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니터에 문제가 생겼다

 

 

장거리 비행은 특별한 일만 없다면 대개는 무난하게 마친다. 승무원들도 노선별 호불호가 있는데 누구는 단거리 비행을 좋아하고 누구는 장거리 비행을 선호하는데 나는 후자다. 단거리에 바람을 가르며 바삐 움직이는 것보다는 집에 며칠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조금은 여유가 있는 장거리 비행이 마음이 편해서다. 하지만 이런 장거리 비행이 최악으로 변하는 순간이 바로 무언가 기계가 고장이 날 때다. 화장실이 갑작스레 고장이 나거나, 갤리(주방)의 오븐장비나 냉장고가 작동을 멈춘다던지, 아니면 승객들이 보는 모니터 화면이 꺼진 채로 살아나지 않는 일이 벌어지면 남은 비행시간이 그렇게 더디게 갈 수가 없다. 

 

당장 비행기 문을 열고 내리고만 싶은 마음으로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일해야 하기 때문에 이때는 장거리 비행이라는게 오히려 독이 되는 순간이다.

 

 

인생은 그런것

 

이날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던 비행 편이었다. 내 담당구역에 네덜란드 가족 3명이 앉았는데 8살 즈음된 남자아이의 모니터가 지상에서부터 말썽이었다. 아이는 엄마랑 같이 앉았고 아빠는 작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옆좌석에 앉았다. 아이와 엄마가 앉은 좌석 모두 모니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재부팅을 두어 차례 했는데도 모니터는 영 살아날 기미가 없었다.

 

아이는 주변 아이들이 보고 있는 디즈니 만화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모니터가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와 자리를 바꾸어 봐도 두 좌석 다 먹통이라 방법이 없었다. 모니터 재부팅도 하고 다른 방법도 써보고 하는데 벌써 한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행여 울지나 않을까 엄마가 혹여 심통이 난 아이를 달래다 짜증이 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가득했는데 모니터는 내 맘도 모르고 계속 먹통이었다.

 

기내에서 승무원이 기계적인 오류를 잡아내는 건 어렵다. 소프트웨어적인 접근으로 해결이 안 되면 결국 지상에서 정비사가 봐야 하는 일이다. 한 시간 반이 다 되도록 모니터가 살아날 기미가 없자 아이 엄마에게 가서 말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모니터가 고장이라 도착해서 정비조치를 받아봐야 할 듯합니다. 아이가 디즈니 영화를 너무 보고 싶어 하는데 모니터를 고쳐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합니다.(영어로)'

 

한 시간이 넘도록 투정 한번 부리지 않은 아이가 대견하기도 했고 너무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이야기를 듣고 복도 옆 아이 아빠가 엄마에게 아이와 자리를 바꿔 앉겠다고 하자 엄마가 손을 들어 아이 아빠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나를 쳐다보며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잊을 수 없는 한 마디를 했다.

 

"Okay, Okay. It's life."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갖고 싶다고 다 가질 수 없고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없다. 이런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는 그 푸른 눈의 외국인 엄마의 삶에 대한 철학이 너무도 멋었었기에 아직도 그날의 그 장면이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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